경주
경주대릉원
[경북 경주시 황남동 31-1] 23기의 신라시대 고분이 모여 있는 고분유적지. 제 13대 미추왕릉과 거대한 표형분(쌍분)의 황남대총, 고분내부 관람이 가능한 천마총의 고분으로 신라 고분유적의 중심!!
본문
경주 분지 한가운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신라 당시에도 수도 서라벌 시가지 가운데에 있는 국가 묘역공원 같은 모습이었으리라 추정한다. 대릉원과 바로 옆에 붙은 쪽샘지구에서 발굴 조사해 보니, 신라 당시의 도시 기반 시설과 건물 터가 대릉원 주변 지역에는 빼곡하게 차 있음에도 대릉원 일대에선 거의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시가지로 가득찬 대도시 가운데지만 대릉원부터는 건물을 못 짓게 개발제한구역으로 관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멸망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관리가 부족해지자 조선시대~일제강점기 에는 대릉원 무덤과 무덤 사이까지 사람들의 주거지가 생겼지만 현대에 들어 정비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대릉원의 무덤들은 문자로 표기된 기록이나 비석류가 일절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편년을 알기는 힘들다. 대릉원의 무덤들은 무덤의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지석도 출토되지 않아서 무덤 주인의 이름이 밝혀진 무덤은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이 발견된 금관총이 유일하다. 하지만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 때문에 도굴이 어려워서 많은 유물들이 별 손실 없이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다. 이 유물들을 측정하여 대략 4-6세기에 걸쳐 조성했다고 추정한다. 6세기 이후에는 왕릉이나 기타 무덤들을 대릉원처럼 서라벌의 중심부가 아닌 산이나 도시 외곽 쪽에 만들었기 때문에, 대릉원은 아무리 늦어도 7세기 초반 이후로는 더 확장되지 않았던 듯하다.
대릉원의 무덤들은 문자로 표기된 기록이나 비석류가 일절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편년을 알기는 힘들다. 대릉원의 무덤들은 무덤의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지석도 출토되지 않아서 무덤 주인의 이름이 밝혀진 무덤은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이 발견된 금관총이 유일하다. 하지만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 때문에 도굴이 어려워서 많은 유물들이 별 손실 없이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다. 이 유물들을 측정하여 대략 4-6세기에 걸쳐 조성했다고 추정한다. 6세기 이후에는 왕릉이나 기타 무덤들을 대릉원처럼 서라벌의 중심부가 아닌 산이나 도시 외곽 쪽에 만들었기 때문에, 대릉원은 아무리 늦어도 7세기 초반 이후로는 더 확장되지 않았던 듯하다.